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미니즘 리부트 (문단 편집) === 페미니즘 '리부트'? === 본서의 제목이 《페미니즘 리부트》 인 것처럼, 저자는 [[2015년]] 이후로 영화 전공자로서 페미니즘이 "[[리부트]]" 되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대한민국 넷페미史》 와 같은 다른 도서들을 찾아보면, 그 이전에도 국내의 페미니즘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는 실제로 발흥기를 거쳤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관점에서 2010년대 중반 이후의 페미니즘은 [[리부트]]라고 할 만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손희정(2015d)의 이 문헌은 여성계에서 크게 공감대를 얻어, 예컨대 김보명(2018)과 같은 후속 논문들을 보면[* 김보명 (2018). 페미니즘의 재부상, 그 경로와 특징들. 경제와사회, 118, 99-138.] 세부적인 각론에서는 표현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연구자들이 간명하게 "리부트" 로 통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리부트되었다는 표현이 필요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하다. 저자 손희정(2015d)은 이와 관련하여, 영화계에서 [[리부트]](reboot)란 "기존 시리즈의 연속성을 버리고 몇몇 기본적인 설정들을 유지하면서 작품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하는 것"(p.47)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이 용어를 두 가지 이유에서 고안했다고 설명한다. 첫째로,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의 계보와 비교할 때 2015년 이래의 페미니즘은 분명히 그 양상이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소비 지향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의 소위 '포스트페미니즘' 문화 속에서 나타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즉, 그 시절과는 달리, 2010년대의 페미니즘은 [[자기계발서|자기실현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경영을 하라]]는 사회적 풍조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 둘째로, 저자는 대중문화의 판매와 소비에 있어서 페미니즘이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리부트' 라는 대중문화 용어를 활용하여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를 더 이어 가면 어째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리부트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도 도출된다. 저자는 2000년대 이후부터 '''[[신자유주의]]적 여성성'''이 새롭게 등장했다고 제안한다.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은 "[[노오력|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자신의 가치를 높여라]], 그래야만 자기실현과 사회적 성공이 가능하다" 는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 결과 '''소비지향적'''이고 '''탈정치적'''인 여성상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는 2000년대 중엽부터 2010년대 초엽까지의 영화들을 살펴보더라도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그 첫째는 '''[[야오이]] 코드'''를 통해 여성들을 영화산업의 소비자로 타깃팅하는 경향,[* 저자는 이 무렵의 영화계가 전반적으로, 미묘한 남성 간 [[동성애]] 코드를 의도적으로 배치해서 여성 관객들의 호응을 얻으려 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그 사례로 〈[[왕의 남자]]〉 를 들고 있다.] 그 둘째는 '''메이크오버 필름'''(makeover film)을 통해서 여성들을 자기계발의 대상으로 타깃팅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야엘 셔먼(Y.D.Sherman)의 논의를 끌어와서, 메이크오버 필름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개발을 독려하며, 여성이 무엇을 자원화하여 어떻게 공적 영역으로 나아갔을 때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지를 전시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그 사례로 〈[[미녀는 괴로워]]〉, 〈[[써니(영화)|써니]]〉, 〈댄싱 퀸〉 등, '못생긴 외모의 여성이 전환점을 거쳐서 일과 사랑을 쟁취하는' 서사구조의 영화들을 거론한다.] 하지만 [[2015년]] 이래로는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여성성이 [[유리천장]]과 같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지점이 있더라" 라는 이 괴리감이 일시에 폭발했다는 것이다. 리부트된 페미니즘은 따라서 태생적으로 '''[[신자유주의]]가 2030 젊은 세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을 드러내며, 자기계발 수사 역시 그 실체가 없는 허구라는 것을 폭로했다는 문화적 의의를 갖는다는 게 손희정(2015d)의 논변이다. 페미니즘이 리부트됨으로써 결국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어진 현실을 정당화하는 힘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저자는 리부트된 페미니즘의 의제가 여전히 '동일노동 동일임금' 과 같은 '''리버럴 페미니즘의 주요 의제들'''에 머물러 있으며, 기존의 사회구조를 전복하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다. 3장에서 손희정(2016a)는 페미니즘의 리부트에 있어서 대중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언급한다.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리부트되는 이면에는 현대적인 '''파퓰러 페미니즘'''(popular feminism)이 존재했고, 이는 다시 ①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여성들의 생존에 대한 염려와 ② [[엠마 왓슨]]이나 [[김숙]] 등의 셀러브리티 페미니즘이 ③ [[트위터]]를 바탕으로 한 '''대안매체 상의 잠재적 기억의 네트워크'''와 결합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 여기서 파퓰러 페미니즘이란 대중문화를 통해 통속화된 페미니즘을 말하는데, 강단 엘리트 페미니즘과는 대척점에 있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중매체를 여성의 적으로 상정하려는 움직임에도 반대한다. 이들은 '''여성운동이 대중매체를 도구적으로 잘 선용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국내에는 일찍이 저 [[양귀자]]나 [[공지영]]의 행보에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저자에 따르면, 비판론자들은 파퓰러 페미니즘이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개혁하기보다는 단지 기존의 페미니즘의 의제 중에 한 종류를 더 추가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특히 자본주의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여성계에서 힘을 얻었다고 한다. 파퓰러 페미니즘에 대한 더 깊은 학술적 논의를 필요로 할 경우, 저자는 《Feminism in Popular Culture》 핸드북에 기고된 Hollows & Moseley(2005)의 논의를 추천하고 있다.] 그런데 90년대의 국내 페미니즘 중흥기에는 "페미니즘이 대중문화를 선용" 하는 형태로 나타났다면, 리부트된 페미니즘은 '''"대중문화가 페미니즘을 재생산"'''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여성들이 [[트위터]] 등을 통하여 의식화되고 소위 말하는 '페미니스트 전사'(…)로 거듭난다는 얘기다. [[트위터]]와 같은 대안매체들이 페미니즘의 리부트에 기여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 손희정(2016a)은 트위터의 '''잠재적 기억의 네트워크'''라는 특징에서 찾고 있다. 트위터에서 개인의 기억과 젠더 의제들은 지속적으로 기억되고, 환기되며, 서로 묶이고, 상호작용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짧고 휘발성 강한 것들'''로서 오래 노출되지 못하지만, 그 기억만큼은 잠재적으로 남아있다가, 각각의 타임라인 속 트윗들이 '''향후 비슷한 의제가 떠오르면 다시 환기됨'''으로써 그 명맥을 이어간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트페미|트위터를 등에 업은 페미니즘]]은 "잊혔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의 귀환"(p.103)을 이루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의 관점에서 트위터는 삶의 기억을 잠재적으로 보존하기 때문에, [[트페미]]들이 다시금 페미니즘을 잊고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향후 비슷한 젠더 이슈가 터져나오면 곧바로 다시 재의식화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할 수 있다. 2장에서 손희정(2015d)은 리부트된 페미니즘의 한계를 두 가지 거론한다. 첫째, 저자는 비록 신자유주의의 메시지가 실패하기는 했어도, 그 각자도생의 가치관이 여전히 살아남아서 '''[[TERF|타자배제적 성향]]의 페미니즘'''을 지속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둘째, 여성들은 스스로를 "현명한 소비자" 로 정의하면서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의 언어와 인식론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삶의 양식은 '''소비중심적 생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소비자성을 극복하지 못한 여성들이 예컨대 [[여성시대]] 등의 집단을 형성하면서, 이들의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적 여성성을 구조적으로 혁파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한 3장에서 손희정(2016a)은, 리부트된 페미니즘이 파퓰러 페미니즘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그것이 쉽사리 소비욕망으로 환원되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다시금 봉사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이를 '''[[정동]]으로서 해석'''함으로써 그 정치화의 힘을 획득하고 대중성 너머의 연대의 길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